한국 현대공예의 전개와 전망 / 허보윤

공예의 시작: 미술공예

한국 공예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선사시대 토기, 신라시대 금관,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달항아리 등, 한국의 자랑스러운 공예품은 실상 만들어질 당시 어느 것도 ‘공예’로 인식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물들을 집합시켜 ‘공예’라는 프레임 안에 넣어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기의 일이다. 즉, 한국 공예의 역사는 근대기에 형성된 관점으로 수천수만 년 전 과거를 호출하여 ‘공예’로 명명함으로써 출발한다. 역사 안에서 과거는 늘 그렇게 새로운 현재로 소환된다.

그런데 근대기에 대체 무슨 일로 말미암아 ‘공예’라는 영역이 생겨난 것일까? 조선시대 백공기예百工技藝의 줄임말로 드물게 사용되던 ‘공예’와는 함의가 다른 ‘공예’라는 말은 19세기 말 신종번역어로 일본을 거쳐 수입되었다. 처음에는 공업 혹은 산업이라는 넓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내 오늘날 공예와 거의 동일한 영역을 지칭하는 ‘미술공예’의 개념으로 정착한다.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 수입하던 19세기 후반, ‘미술’, ‘공예’, ‘공업’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번역어로 함께 사용되다가 점차 ‘미술’은 ‘순수미술’로, ‘공업’은 ‘산업’으로, 그리고 ‘공예’는 ‘미술공예’로 분화되었고, 그 용어가 그대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공예’ 나아가 ‘미술공예’는 서양에 내다 팔기 위한 수출공예품을 근저에 둔, 식산흥업·부국강병책의 일환이었다. 즉, 미술공예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만족시켜주는 동양 혹은 일본의 이미지를 공예품으로 구현하여 서양에 수출하는 상품이라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었다. 동시에 미술공예는 근대 민족국가로서 일본의 문화적 역량을 서양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매우 좋은 매개체였다. 수출품으로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더불어 민족국가의 문화적 자격을 충족시켜준 미술공예는, 그러므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흥하고 지원하는 영역이었다. 또한, 당시 미술공예는 수출공예품의 수공제작은 물론 도안(디자인)과 양산시스템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미술공예 개념이 20세가 초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되는데, 당시 통치자였던 일본 제국주의 입맛에 맞춰 다시 한번 번역된다. 서양이 일본에 투사했던 욕망의 시선을, 제국 일본이 한국에 그대로 투사한 것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디자인사가 기쿠치 유코는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같은 시선으로 한국 공예품을 바라보았음을 밝히며, 그러한 시선에 ‘오리엔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렇듯 이중번역 과정을 거친 미술공예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에 근대적 의미의 ‘공예’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공예라는 영역이 싹을 틔우자, 미천한 기술에 머물렀던 일련의 사물제작 활동은 예술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공예품은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공예품 제작자 역시 근대적 엘리트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개 미술학교(대학)나 진흥기관(시범소, 기술전수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에서 공예를 배웠고, 근대성을 선취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선구적 인물로 자리매김되었다. 근대기의 미술공예 개념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1970년대 일본 내 한국도자기 열풍으로 다시 한번 부활한 후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련의 사물제작을 기술의 영역에서 ‘공예’라는 예술 영역으로 올려놓은 점,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밖으로 내보이는 일에 적합한 매개물로 공예품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현대공예의 성립서양 공예 담론의 직수입

미술공예 개념을 희미하게 만든 공예 영역의 재편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는 해방 후 설립된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공예교육을 시행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때 공예는 근대기 미술공예의 연속 혹은 확장이 아니라, 20세기 중반 직수입된 서양의 공예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고, 이것이 바로 ‘현대공예’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현대공예’는 1960년대 공예의 재편 과정 중 발생한 하나의 장르로, 전승공예, 산업공예, 취미공예 등과 함께 오늘날 공예의 하위범주를 구성하고 있다.

서양에서 현대공예의 등장이 사회변화와 산업발달에 따른 자생적 출현이었다면, 한국의 현대공예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학의 공예과가 한국 현대공예의 산실이었고, 대학의 공예 교육자가 바로 현대공예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현대공예의 성립 시점에 대학교육을 담당한, 이른바 현대공예 1세대는 현대공예의 성격 구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특징은 우선 대부분이 당대 서양의 현대공예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이다. 서양 선진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 혹은 연수를 다녀오거나,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에게 교육을 받는 등의 직접 경험은, 일본을 거쳐 수입된, 즉 두 번 이상의 번역과정을 거친 미술공예와는 다른 성격을 현대공예에 부여했다.

우선, 제작기술 습득을 통한 수공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어려운 여건 탓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제작 실습교육을 현대공예 1세대는 어떻게든 감행했고, 실습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외부에 제작을 맡기던 소위 ‘발주공예’가 편법으로 치부되기 시작했고, 연습과 훈련을 통해 제작기술을 익혀 손수 만드는 것이 진짜 공예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후 몸-기술을 담지한 직접제작은 공예를 규정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몸-기술의 강조는 암묵적 지식의 가치를 인식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개인성의 발견과 맥이 닿아 있었다. 생산시스템을 통한 사물제작이 아닌 개인의 창작으로서 공예는 개인 작가의 손에서 시작해 끝을 맺어야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미술공예가 도안과 제작을 분리했다거나, 나전과 칠처럼 성격이 다른 제작과정이 일찍이 분업화했던 것과 달리, 현대공예는 구상과 제작이 한 개인 안에서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생산조직이나 기술교육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사물제작을 개인의 예술적 활동으로 못박음으로써 현대공예는 19세기 서양 낭만주의 예술관 안에 편입되었다. 근대기 미술공예가 수출을 위한 산업제품을 예술의 차원에 올려놓았다면, 현대공예는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 공예품을 이해했다. 근대적 엘리트에다가 미술작가의 위상을 보탠 현대공예가의 입지도 공고히 구축되었다. 현대공예 1세대가 서양을 통해 습득한 공예는, 그러므로 사물제작이라기보다 예술창작에 더 가까웠고, 이것이 현대공예의 두 번째 커다란 특징이 되었다.

국전으로 불리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일제 강점기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의 형식을 이어받았으나, 공예부문 출품작은 미술공예에서 현대공예로 이행한 후 성격이 달라졌다. 선전에 청자재현품이 출품되거나 국전 초기 공예부문에서 장식그림이 입상하는 등의 사례는 미술공예 개념의 존속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공예 개념이 등장한 이후에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까지 현대공예는 미술공예에서 출발한 수출산업역군 이미지와 예술창작 이미지 사이에서 우화 속 박쥐 같은 입장이었다. 이는 미술공모전인 국전과 수출산업진흥을 위한 디자인공모전인 상공미전(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1966년 출범) 양쪽 모두에 공예부문이 설치되면서 발생한 다수의 논박에서 잘 드러난다.

현대공예의 세 번째 특징은, 서구적 현대성의 강조라 할 수 있다. 미술공예의 경우, 밖에 내보이기 위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 긴요했지만, 현대공예는 내부를 향해 나의 선진성을 강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러므로 한국성이나 전통의 담론보다 서양의 선진적 신개념의 옷을 입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한국 현대공예 1세대는 당시 매우 드물었던 서양 경험만으로도 서구 선진 교육의 수혜를 내세워 스스로를 차별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을 향한 서구적 현대성의 강조는 이른바 전승공예를 타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에 묶인 타자의 존재를 통해 현대성을 현대공예의 본질로 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술공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현대공예와 전승공예의 구분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한국 현대공예는, 미술공예 시절과 달리, 서양의 공예·디자인 역사를 거쳐 구성된 공예 담론 또한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산업혁명으로 사물제작 활동의 대부분을 기계에 빼앗기고, 순수미술에 못 미치는 열등한 장르로 전락한 공예의 운명을 한탄하며, 공예의 가치와 예술성을 주장한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사상이 바로 서양의 공예 담론을 대표하고 있었다. 서양 역사 안에서 구성된 이러한 공예 담론이 동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였는데, 실상 당시 ‘미술공예’는 결코 기계와 순수미술에 치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한 분야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 전략산업의 일환으로서 미술공예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사회적 위상도 높은 편이었다. 일본의 미술공예를 재수입한 한국에서도 근대기 공예는 공급량이 미약했을 뿐 위상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공예 담론은 점차 공예를 위태로운 상황으로 설정하기 시작한다. 실상 한국에서는 기계생산·산업화의 시작과 현대공예의 등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즉, 기계산업사회의 잔여물 혹은 피해자로 현대공예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1960년대 시작된 한국 현대공예는 서양 공예 담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위계구조에 따라 사회적 위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한국 현대공예의 80-90년대순수미술화

1960년대 한국에 수입된 서양의 공예 담론은 근본적으로 17-19세기에 출몰한 순수미술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래리 샤이너는 『순수예술의 발명』에서 순수예술 개념이 등장하면서 공예를 하위에 두어 상대적으로 순수예술의 우월성을 공고히 했음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칸트가 주장한 무목적성이 순수예술을 규정하는 제1원리가 된 후, ‘미’의 추구 이외에 실용성이라는 다른 목적을 가지는 공예는 순수예술이 될 수 없다는 퇴출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순수예술을 오직 아름다움을 좇는 숭고한 세계로 상정하는 미술사와 미학에서 공예는 순수미술의 순수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대조항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덕분에 기능 혹은 실용성의 문제는 19-20세기 내내 공예를 규정하는 가늠자가 되어 왔다. 이러한 순수예술 미학에 반발한 서양의 대표적인 공예 담론의 주창자가 바로 모리스였다. 그는 예술의 폭을 넓혀, 공예는 물론 삶조차 예술로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순수예술이라는 좁은 범주의 예술 개념에 반대하고, 실용성을 가진 생활환경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한 예술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1960년대 이래 미국의 공예가들은 순수예술 미학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공예가 가진 목적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순수미술과 마찬가지로 오직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을 선택함으로써 순수미술 안으로 진입을 꾀했다. 피터 볼커스를 비롯한 이른바 추상표현주의 도자와 섬유예술 분야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들의 시도는 도전적이었으나, 대부분 순수미술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굴욕적인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실용성을 버리고 순수미술화한 공예 흐름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이 현대미술사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변방의 활동으로 존재한다.

1970-8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한국 현대공예 2세대는 미국의 이러한 변화를 열심히 배웠고, 더불어 1970년대 부쩍 잦아진 서양 특히 미국 현대공예초대전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겼다. 미술의 위계구조 안에서 공예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여겼던 공예가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순수미술가가 되고자 애썼다. 실용성 즉 사물의 기능을 버리고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미적 활동으로서 공예를 바라보았고, 이를 교육했다. 이것이 1980-90년대 한국의 현대공예를 대변하는 주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960-70년대 한국 현대공예 1세대는 전승공예와 달리 현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평가받았는데, 같은 인물의 유사한 작품이 1980년대에는 전통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상반된 평을 듣게 된다. 대개 ‘기器’의 형상이었던 현대공예 1세대 작품은, 1980-90년대 빠르게 과거와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의미가 전환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모두 호의적이진 않아서, 모리스나 야나기의 사상을 따라 실용성을 강조하는 공방공예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0년대 이래 한국 현대공예 담론은 ‘기능’을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실용 대 비실용의 논쟁을 끝없이 길고 지루하게 반복했으나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순수미술 추수 경향은 1990년대 말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하여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공예는 다소 복잡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국 현대공예의 오늘과 내일일상성과 사물성

2000년 이후 현대공예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이른바 ‘다양성’이었다. 기능을 가진 실용품이든 기능이 없는 미술작품이든 모두 포용하자는 의미의 다양성이자, 공예의 재료적 혹은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성, 나아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제작방식의 확장적 다양성까지,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이 거론되었다. 학문계나 교육계에서는 이를 ‘융복합’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했다. 학제 간 연구를 권장하고 기존 학문 간의 장벽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밥그릇 싸움으로 불리는 경쟁 속에서 옹벽을 쌓아 자신의 학문 영역을 지키려는 욕망이, 사회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이나 학문 발전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고자 융복합이나 다양성을 사회의 화두로 삼았을 것이다. 공예와 순수미술 혹은 공예와 디자인 역시 교류와 통섭이 필요하다. 그러나 융복합과 다양성의 추구가 공예, 디자인, 순수미술을 구분 없이 뒤섞어 버리자는 말일 리는 없다. 오히려 각 영역의 정체성이 뚜렷할 때 제대로 된 통섭과 교류를 이룰 수 있고, 경계선 안팎에서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공예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어떤 정체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간의 정체성 논쟁은 앞서 말했듯이 주로 실용적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밖에 수공, 재료, 기술, 전통 등이 공예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흔히 거론되었다. 앞서 근대 미술공예 시대부터 1960-70년대 현대공예의 성립기 그리고 현대공예가 순수미술화한 1980-90년대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이유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현대공예의 성격과 정체성이 여러 방향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백여 년의 시간 안에서 공예는 다채로운 성격을 얻고 또 잃었다. 이러한 변천의 역사 속에서 현대공예의 본질을 찾는 일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시점에 미래를 위해 공예가 어떤 정체성으로 무장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제 공예를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다. 21세기 공예를 위한 새로운 기준점으로 나는 ‘일상성’과 ‘사물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두 가지 모두 공예 담론 안에 이미 존재해왔던 개념이나, 현대공예의 가치를 시의성 있게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상성은 실용성을 공간적으로 확장한 개념으로, 생활공간에 존재하는 공예를 뜻한다. 가정, 일터, 휴식공간, 놀이공간 등 일상적 공간에 놓이는 사물을 만드는 일에 현대공예는 관여한다. 실제적 실용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크게 중요치 않다. 일상공간의 대조항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이 오로지 작품만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특수공간이다. 갤러리 내 사무실은 일상공간이 될 수 있지만, 갤러리의 전시대 위는 일상공간이 아니다. 순수미술 담론이 설정하고 있는,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공예는 일상공간에서 맡은 배역을 수행할 때 빛이 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마치 박제된 것 같이 보인다. 주변의 사물과 대화하듯 조화를 이루는 공간 안에서 공예는 살아 있다. 일상을 진부하고 반복적이라며 하찮게 여기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1960년대 이래 일상성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 담론도 늘고 있다. 예술이 특별한 경험세계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일상영역이라는 ‘생활예술’ 이론도 눈에 띈다.

사물성은 우선 3차원의 물질성을 뜻한다. 구체적인 물질로서 재료와, 재료를 다루는 숙련기술을 통한 3차원의 사물제작이 사물성의 바탕을 이루나,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이미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물성의 대조항은 이미지성이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이 이미지에 기대어 있다면, 공예는 실제 사물을 만드는 일이다. 하나의 기호 안에 사물성과 이미지성이 대개는 공존하지만, 관점에 따라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이 다르다. 가방의 재질, 만듦새, 기능, 옷과의 조화는 사물성에 기인하고, 가방의 명품브랜드는 이미지에 해당한다. 미술가는 사과를 그리지만, 공예가는 누군가 먹을 사과를 키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물성은 인류의 물질문화를 구성한 동력이었고, 그렇기에 사물성에 대한 숙고는 우리의 물질문화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인류의 물질문화사는 놀랍고 자랑스러운 한편 기후나 자원 등의 환경문제를 야기한 주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부추긴 근현대 물질문화의 폐해를 깨닫고 더욱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기에 공예적 사물성은 매우 유용하다.

공예를 사물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더이상 예술이나 순수미술 담론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예술이라고 은유한다면 모를까, 공예가 굳이 미술 혹은 예술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사물제작 활동으로 공예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공예가 구축한 물질문화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시대적 문제를 발생시켰는지를 훤히 볼 수 있다. 오늘날 공예는 자본주의가 낳은 저급한 물질문화를 거부하고 질적으로 더 나은 물질문화를 구축하기 위한 사물제작 행위다. 한국 최초의 공예박물관이 공예를 박제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공예를 위시한 물질문화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문제 인식과 미래의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는 살아있는 기관이 되길 바란다.

허보윤
현대공예이론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

(서울공예박물관 개관기획전_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 서문)

한국 현대공예의 전개와 전망 / 허보윤

공예의 시작: 미술공예

한국 공예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선사시대 토기, 신라시대 금관,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달항아리 등, 한국의 자랑스러운 공예품은 실상 만들어질 당시 어느 것도 ‘공예’로 인식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물들을 집합시켜 ‘공예’라는 프레임 안에 넣어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기의 일이다. 즉, 한국 공예의 역사는 근대기에 형성된 관점으로 수천수만 년 전 과거를 호출하여 ‘공예’로 명명함으로써 출발한다. 역사 안에서 과거는 늘 그렇게 새로운 현재로 소환된다.

그런데 근대기에 대체 무슨 일로 말미암아 ‘공예’라는 영역이 생겨난 것일까? 조선시대 백공기예百工技藝의 줄임말로 드물게 사용되던 ‘공예’와는 함의가 다른 ‘공예’라는 말은 19세기 말 신종번역어로 일본을 거쳐 수입되었다. 처음에는 공업 혹은 산업이라는 넓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내 오늘날 공예와 거의 동일한 영역을 지칭하는 ‘미술공예’의 개념으로 정착한다.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 수입하던 19세기 후반, ‘미술’, ‘공예’, ‘공업’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번역어로 함께 사용되다가 점차 ‘미술’은 ‘순수미술’로, ‘공업’은 ‘산업’으로, 그리고 ‘공예’는 ‘미술공예’로 분화되었고, 그 용어가 그대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공예’ 나아가 ‘미술공예’는 서양에 내다 팔기 위한 수출공예품을 근저에 둔, 식산흥업·부국강병책의 일환이었다. 즉, 미술공예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만족시켜주는 동양 혹은 일본의 이미지를 공예품으로 구현하여 서양에 수출하는 상품이라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었다. 동시에 미술공예는 근대 민족국가로서 일본의 문화적 역량을 서양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매우 좋은 매개체였다. 수출품으로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더불어 민족국가의 문화적 자격을 충족시켜준 미술공예는, 그러므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흥하고 지원하는 영역이었다. 또한, 당시 미술공예는 수출공예품의 수공제작은 물론 도안(디자인)과 양산시스템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미술공예 개념이 20세가 초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되는데, 당시 통치자였던 일본 제국주의 입맛에 맞춰 다시 한번 번역된다. 서양이 일본에 투사했던 욕망의 시선을, 제국 일본이 한국에 그대로 투사한 것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디자인사가 기쿠치 유코는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같은 시선으로 한국 공예품을 바라보았음을 밝히며, 그러한 시선에 ‘오리엔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렇듯 이중번역 과정을 거친 미술공예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에 근대적 의미의 ‘공예’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공예라는 영역이 싹을 틔우자, 미천한 기술에 머물렀던 일련의 사물제작 활동은 예술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공예품은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공예품 제작자 역시 근대적 엘리트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개 미술학교(대학)나 진흥기관(시범소, 기술전수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에서 공예를 배웠고, 근대성을 선취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선구적 인물로 자리매김되었다. 근대기의 미술공예 개념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1970년대 일본 내 한국도자기 열풍으로 다시 한번 부활한 후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련의 사물제작을 기술의 영역에서 ‘공예’라는 예술 영역으로 올려놓은 점,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밖으로 내보이는 일에 적합한 매개물로 공예품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현대공예의 성립서양 공예 담론의 직수입

미술공예 개념을 희미하게 만든 공예 영역의 재편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는 해방 후 설립된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공예교육을 시행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때 공예는 근대기 미술공예의 연속 혹은 확장이 아니라, 20세기 중반 직수입된 서양의 공예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고, 이것이 바로 ‘현대공예’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현대공예’는 1960년대 공예의 재편 과정 중 발생한 하나의 장르로, 전승공예, 산업공예, 취미공예 등과 함께 오늘날 공예의 하위범주를 구성하고 있다.

서양에서 현대공예의 등장이 사회변화와 산업발달에 따른 자생적 출현이었다면, 한국의 현대공예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학의 공예과가 한국 현대공예의 산실이었고, 대학의 공예 교육자가 바로 현대공예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현대공예의 성립 시점에 대학교육을 담당한, 이른바 현대공예 1세대는 현대공예의 성격 구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특징은 우선 대부분이 당대 서양의 현대공예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이다. 서양 선진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 혹은 연수를 다녀오거나,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에게 교육을 받는 등의 직접 경험은, 일본을 거쳐 수입된, 즉 두 번 이상의 번역과정을 거친 미술공예와는 다른 성격을 현대공예에 부여했다.

우선, 제작기술 습득을 통한 수공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어려운 여건 탓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제작 실습교육을 현대공예 1세대는 어떻게든 감행했고, 실습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외부에 제작을 맡기던 소위 ‘발주공예’가 편법으로 치부되기 시작했고, 연습과 훈련을 통해 제작기술을 익혀 손수 만드는 것이 진짜 공예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후 몸-기술을 담지한 직접제작은 공예를 규정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몸-기술의 강조는 암묵적 지식의 가치를 인식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개인성의 발견과 맥이 닿아 있었다. 생산시스템을 통한 사물제작이 아닌 개인의 창작으로서 공예는 개인 작가의 손에서 시작해 끝을 맺어야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미술공예가 도안과 제작을 분리했다거나, 나전과 칠처럼 성격이 다른 제작과정이 일찍이 분업화했던 것과 달리, 현대공예는 구상과 제작이 한 개인 안에서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생산조직이나 기술교육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사물제작을 개인의 예술적 활동으로 못박음으로써 현대공예는 19세기 서양 낭만주의 예술관 안에 편입되었다. 근대기 미술공예가 수출을 위한 산업제품을 예술의 차원에 올려놓았다면, 현대공예는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 공예품을 이해했다. 근대적 엘리트에다가 미술작가의 위상을 보탠 현대공예가의 입지도 공고히 구축되었다. 현대공예 1세대가 서양을 통해 습득한 공예는, 그러므로 사물제작이라기보다 예술창작에 더 가까웠고, 이것이 현대공예의 두 번째 커다란 특징이 되었다.

국전으로 불리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일제 강점기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의 형식을 이어받았으나, 공예부문 출품작은 미술공예에서 현대공예로 이행한 후 성격이 달라졌다. 선전에 청자재현품이 출품되거나 국전 초기 공예부문에서 장식그림이 입상하는 등의 사례는 미술공예 개념의 존속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공예 개념이 등장한 이후에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까지 현대공예는 미술공예에서 출발한 수출산업역군 이미지와 예술창작 이미지 사이에서 우화 속 박쥐 같은 입장이었다. 이는 미술공모전인 국전과 수출산업진흥을 위한 디자인공모전인 상공미전(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1966년 출범) 양쪽 모두에 공예부문이 설치되면서 발생한 다수의 논박에서 잘 드러난다.

현대공예의 세 번째 특징은, 서구적 현대성의 강조라 할 수 있다. 미술공예의 경우, 밖에 내보이기 위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 긴요했지만, 현대공예는 내부를 향해 나의 선진성을 강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러므로 한국성이나 전통의 담론보다 서양의 선진적 신개념의 옷을 입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한국 현대공예 1세대는 당시 매우 드물었던 서양 경험만으로도 서구 선진 교육의 수혜를 내세워 스스로를 차별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을 향한 서구적 현대성의 강조는 이른바 전승공예를 타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에 묶인 타자의 존재를 통해 현대성을 현대공예의 본질로 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술공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현대공예와 전승공예의 구분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한국 현대공예는, 미술공예 시절과 달리, 서양의 공예·디자인 역사를 거쳐 구성된 공예 담론 또한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산업혁명으로 사물제작 활동의 대부분을 기계에 빼앗기고, 순수미술에 못 미치는 열등한 장르로 전락한 공예의 운명을 한탄하며, 공예의 가치와 예술성을 주장한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사상이 바로 서양의 공예 담론을 대표하고 있었다. 서양 역사 안에서 구성된 이러한 공예 담론이 동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였는데, 실상 당시 ‘미술공예’는 결코 기계와 순수미술에 치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한 분야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 전략산업의 일환으로서 미술공예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사회적 위상도 높은 편이었다. 일본의 미술공예를 재수입한 한국에서도 근대기 공예는 공급량이 미약했을 뿐 위상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공예 담론은 점차 공예를 위태로운 상황으로 설정하기 시작한다. 실상 한국에서는 기계생산·산업화의 시작과 현대공예의 등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즉, 기계산업사회의 잔여물 혹은 피해자로 현대공예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1960년대 시작된 한국 현대공예는 서양 공예 담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위계구조에 따라 사회적 위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한국 현대공예의 80-90년대순수미술화

1960년대 한국에 수입된 서양의 공예 담론은 근본적으로 17-19세기에 출몰한 순수미술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래리 샤이너는 『순수예술의 발명』에서 순수예술 개념이 등장하면서 공예를 하위에 두어 상대적으로 순수예술의 우월성을 공고히 했음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칸트가 주장한 무목적성이 순수예술을 규정하는 제1원리가 된 후, ‘미’의 추구 이외에 실용성이라는 다른 목적을 가지는 공예는 순수예술이 될 수 없다는 퇴출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순수예술을 오직 아름다움을 좇는 숭고한 세계로 상정하는 미술사와 미학에서 공예는 순수미술의 순수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대조항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덕분에 기능 혹은 실용성의 문제는 19-20세기 내내 공예를 규정하는 가늠자가 되어 왔다. 이러한 순수예술 미학에 반발한 서양의 대표적인 공예 담론의 주창자가 바로 모리스였다. 그는 예술의 폭을 넓혀, 공예는 물론 삶조차 예술로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순수예술이라는 좁은 범주의 예술 개념에 반대하고, 실용성을 가진 생활환경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한 예술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1960년대 이래 미국의 공예가들은 순수예술 미학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공예가 가진 목적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순수미술과 마찬가지로 오직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을 선택함으로써 순수미술 안으로 진입을 꾀했다. 피터 볼커스를 비롯한 이른바 추상표현주의 도자와 섬유예술 분야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들의 시도는 도전적이었으나, 대부분 순수미술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굴욕적인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실용성을 버리고 순수미술화한 공예 흐름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이 현대미술사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변방의 활동으로 존재한다.

1970-8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한국 현대공예 2세대는 미국의 이러한 변화를 열심히 배웠고, 더불어 1970년대 부쩍 잦아진 서양 특히 미국 현대공예초대전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겼다. 미술의 위계구조 안에서 공예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여겼던 공예가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순수미술가가 되고자 애썼다. 실용성 즉 사물의 기능을 버리고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미적 활동으로서 공예를 바라보았고, 이를 교육했다. 이것이 1980-90년대 한국의 현대공예를 대변하는 주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960-70년대 한국 현대공예 1세대는 전승공예와 달리 현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평가받았는데, 같은 인물의 유사한 작품이 1980년대에는 전통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상반된 평을 듣게 된다. 대개 ‘기器’의 형상이었던 현대공예 1세대 작품은, 1980-90년대 빠르게 과거와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의미가 전환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모두 호의적이진 않아서, 모리스나 야나기의 사상을 따라 실용성을 강조하는 공방공예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0년대 이래 한국 현대공예 담론은 ‘기능’을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실용 대 비실용의 논쟁을 끝없이 길고 지루하게 반복했으나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순수미술 추수 경향은 1990년대 말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하여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공예는 다소 복잡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국 현대공예의 오늘과 내일일상성과 사물성

2000년 이후 현대공예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이른바 ‘다양성’이었다. 기능을 가진 실용품이든 기능이 없는 미술작품이든 모두 포용하자는 의미의 다양성이자, 공예의 재료적 혹은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성, 나아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제작방식의 확장적 다양성까지,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이 거론되었다. 학문계나 교육계에서는 이를 ‘융복합’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했다. 학제 간 연구를 권장하고 기존 학문 간의 장벽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밥그릇 싸움으로 불리는 경쟁 속에서 옹벽을 쌓아 자신의 학문 영역을 지키려는 욕망이, 사회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이나 학문 발전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고자 융복합이나 다양성을 사회의 화두로 삼았을 것이다. 공예와 순수미술 혹은 공예와 디자인 역시 교류와 통섭이 필요하다. 그러나 융복합과 다양성의 추구가 공예, 디자인, 순수미술을 구분 없이 뒤섞어 버리자는 말일 리는 없다. 오히려 각 영역의 정체성이 뚜렷할 때 제대로 된 통섭과 교류를 이룰 수 있고, 경계선 안팎에서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공예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어떤 정체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간의 정체성 논쟁은 앞서 말했듯이 주로 실용적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밖에 수공, 재료, 기술, 전통 등이 공예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흔히 거론되었다. 앞서 근대 미술공예 시대부터 1960-70년대 현대공예의 성립기 그리고 현대공예가 순수미술화한 1980-90년대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이유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현대공예의 성격과 정체성이 여러 방향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백여 년의 시간 안에서 공예는 다채로운 성격을 얻고 또 잃었다. 이러한 변천의 역사 속에서 현대공예의 본질을 찾는 일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시점에 미래를 위해 공예가 어떤 정체성으로 무장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제 공예를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다. 21세기 공예를 위한 새로운 기준점으로 나는 ‘일상성’과 ‘사물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두 가지 모두 공예 담론 안에 이미 존재해왔던 개념이나, 현대공예의 가치를 시의성 있게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상성은 실용성을 공간적으로 확장한 개념으로, 생활공간에 존재하는 공예를 뜻한다. 가정, 일터, 휴식공간, 놀이공간 등 일상적 공간에 놓이는 사물을 만드는 일에 현대공예는 관여한다. 실제적 실용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크게 중요치 않다. 일상공간의 대조항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이 오로지 작품만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특수공간이다. 갤러리 내 사무실은 일상공간이 될 수 있지만, 갤러리의 전시대 위는 일상공간이 아니다. 순수미술 담론이 설정하고 있는,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공예는 일상공간에서 맡은 배역을 수행할 때 빛이 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마치 박제된 것 같이 보인다. 주변의 사물과 대화하듯 조화를 이루는 공간 안에서 공예는 살아 있다. 일상을 진부하고 반복적이라며 하찮게 여기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1960년대 이래 일상성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 담론도 늘고 있다. 예술이 특별한 경험세계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일상영역이라는 ‘생활예술’ 이론도 눈에 띈다.

사물성은 우선 3차원의 물질성을 뜻한다. 구체적인 물질로서 재료와, 재료를 다루는 숙련기술을 통한 3차원의 사물제작이 사물성의 바탕을 이루나,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이미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물성의 대조항은 이미지성이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이 이미지에 기대어 있다면, 공예는 실제 사물을 만드는 일이다. 하나의 기호 안에 사물성과 이미지성이 대개는 공존하지만, 관점에 따라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이 다르다. 가방의 재질, 만듦새, 기능, 옷과의 조화는 사물성에 기인하고, 가방의 명품브랜드는 이미지에 해당한다. 미술가는 사과를 그리지만, 공예가는 누군가 먹을 사과를 키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물성은 인류의 물질문화를 구성한 동력이었고, 그렇기에 사물성에 대한 숙고는 우리의 물질문화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인류의 물질문화사는 놀랍고 자랑스러운 한편 기후나 자원 등의 환경문제를 야기한 주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부추긴 근현대 물질문화의 폐해를 깨닫고 더욱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기에 공예적 사물성은 매우 유용하다.

공예를 사물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더이상 예술이나 순수미술 담론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예술이라고 은유한다면 모를까, 공예가 굳이 미술 혹은 예술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사물제작 활동으로 공예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공예가 구축한 물질문화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시대적 문제를 발생시켰는지를 훤히 볼 수 있다. 오늘날 공예는 자본주의가 낳은 저급한 물질문화를 거부하고 질적으로 더 나은 물질문화를 구축하기 위한 사물제작 행위다. 한국 최초의 공예박물관이 공예를 박제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공예를 위시한 물질문화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문제 인식과 미래의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는 살아있는 기관이 되길 바란다.

허보윤
현대공예이론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

(서울공예박물관 개관기획전_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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